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 칼뱅 (문단 편집) == 인물 관계 == *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 [[파일:705px-GuillaumeFarel.jpg|width=300]] >명예도 부귀도 나를 [[교황]]으로부터 자유케 하지 못하고 도리어 나를 묶어 두었다. 세상의 어떤 통찰력과 학식들도 내 마음 속에 있는 교황주의의 미신을 제거하지 못했다. 오직 [[성경]]만이 나로 하여금 교황주의의 미신으로부터 빠져 나오게 만들었다.[* 출처 : 아이굿뉴스(http://www.igoodnews.net)] 칼뱅의 동역자 중에서도 특히 친밀한 사람이었고 제네바 종교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본래 [[가톨릭]] 집안에서 신실한 장남으로 자랐지만 공부를 하던 도중 스승의 추천으로 신약 성경을 읽다가 [[가톨릭]]의 교리적 문제를 발견하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중보자가 없다며 부패한 교회에 대한 개혁의 목소리를 외쳤다. 곧 교황청의 탄압으로 설교를 금지당하고 추방당해 쫒기는 신세가 되어 이리저리 떠돌며 설교를 하다가 1532년, [[제네바]]에 도착했다. 파렐은 [[베른]]의 강력한 보호 아래에 설교를 이어나갔으며 제네바 의회에서는 개신교적 원칙에 따라 [[미사]]가 폐지하고 성상과 성물들을 성당에서 제거했다. 1536년, 칼뱅이 제네바에 도착했음을 알고 파렐은 급히 칼뱅이 머물던 여관으로 달려갔다. 파렐은 칼뱅에게 종교개혁에 동참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칼뱅은 당시만 해도 학자로서 조용히 은거하며 지내고 싶었고 그래서 거절했다. 그러자 파렐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한, 나는 하나님께서 그대의 휴식과 공부를 저주하시길 바라오!'''라고 불같이 소리쳤다. 공포에 떨며 식겁하던 칼뱅은 자신의 뜻을 거두고 종교개혁에 동참하게 되었다. 훗날 칼뱅은 이 때의 일을 두고 >이때 나는 파렐의 무서운 엄명에 두려워 견디지 못해 몸이 떨렸다. 그의 음성이 마치 높은 보좌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과도 같았다. 라고 회고했다. 이후 파렐이 칼뱅보다 스무 살이나 많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파렐은 자기보다 어린 칼뱅을 배려하며 자신의 저작 서문에서 오히려 칼뱅의 기독교 강요를 추천했으며 칼뱅 역시 파렐을 '나의 사랑하는 동역자'라고 존경을 표했다. 둘의 우정이 깨진 것은 1558년, 파렐이 69세가 되던 해에 18세 가난한 처녀와 [[조혼|결혼]]하는 일 때문이었다. 칼뱅을 포함한 많은 종교개혁자들은 이 결혼을 반대했고 칼뱅은 결혼식에 참석도 안 했다. 그러나 파렐 역시 자신의 뜻은 절대 굽히지 않는 성격으로[* 이러한 성격 때문에 종교개혁을 계속 이끌어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어린 처녀와 결혼을 해 자녀를 낳았다. 1565년, 메츠 지역 신교도들의 요청에 따라 메츠를 방문해 마지막 설교를 했고 그해 9월 눈을 감았다. * [[마르틴 루터]] >'''나는 그가 나를 악마라고 저주하더라도 영원한 존경을 보낼 것이다.''' >-칼뱅이 루터를 비판하는 사람에게 쓴 편지 내용 중 칼뱅의 신학에 매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종교개혁자이며 자세한 내용은 루터 항목 6번 참조. 루터 역시 칼뱅을 높이 평가했다. * 테오도르 드 베즈(Théodore de Bèze, 1519–1605) [[파일:Bèze,_Théodore_de_(1519-1605)_-_1596_-_inc_Boissard,_J.J_Bibliotheca_chalcographica_-1652-69.png]] 칼뱅의 중요한 동료이자 그의 종교개혁 노선을 계속 이어나갔던 후임자이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베즈는 어린 시절 스승인 메히오르 볼마르 밑에서 가르침을 받았고 후에 베즈 자신의 두 번째 생일로 기억할 정도로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칼뱅 또한 볼마르 밑에서 수학했다.] 아버지의 추천으로 시작한 법학 공부에도 별 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고전 읽기를 즐겼다. 파리에서 베즈는 문학동아리에서 명성을 쌓아 당대 최고의 라틴어 시인으로 손꼽힐 정도였다. 2년 동안 행복한 삶을 살다가 [[페스트]]로 추정되는 중병을 앓았다. 육체적인 고통 속에서 베즈는 종교적인 성향으로 기울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을 알고 확신하며 당시 종교개혁 운동이 한참이던 [[제네바]]로 향했다. 1548년 칼뱅은 제네바에 도착한 베즈를 환영했고[* 볼마르의 제자들로서 서로 면식 있는 사이었다.] 곧 칼뱅의 주례로 베즈의 약혼자와 공식적으로 결혼했다. 하지만 가정을 꾸리게 된 베즈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았는데, 베른이 지배하는 로잔 아카데미가 유일한 자신의 일자리였다.[* 유일하게 프랑스어로 강의하는 개혁파 아카데미였다.] 도움을 요청하러 다시 자신의 옛스승 볼마르를 찾아가던 도중 피에르 비레를 만났다. 비레는 베즈의 탁월한 재능을 알아보고 로잔 아카데미의 헬라어 교수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이후 베즈는 종교개혁자들을 강력히 변호하는 활동에 앞장섰다. 특별히 [[발도파]]에 관심을 가지고 보호하기 위해 기욤 파렐과 스위스와 프랑스 지역을 돌아다니며 동행했다. [[위그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독일 제후들을 중재해 파리로 특사로 파견하도록 성사시켰고 프랑스를 방문해 위그노들을 위해 설교한 뒤 박해 대응책과 저항을 기획했다. 베즈는 칼뱅과 자신의 역할을 번갈아가며 총회와 회의에 참석해 칼뱅을 포함한 종교개혁자들을 옹호하는 활동을 계속했으며 칼뱅이 죽은 뒤 베즈는 그의 후임자가 되어 제네바가 칼뱅의 종교개혁 노선을 계속 이어나가도록 했다. 칼뱅이 세운 [[제네바 대학교]]를 이끌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사건 때 피난민들을 제네바로 받아들이는데 힘을 썼으며 만년에 [[프랑수아 드 살]](François de Sales) 신부가 베즈를 방문해 세 차례 개종을 위한 설득을 했지만 베즈는 단호히 거절했다. 1602년, 가톨릭에 속한 [[사보이아 공국]]이 제네바를 공격했지만 제네바는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고 베즈도 무사했다. 1605년, 베즈는 자기 집에서 숨을 거두었고 [[사보이아 공국]]은 베즈의 시신을 강탈하겠다고 협박한 상황이었다. 이에 대비한 당국의 지시에 따라 베즈의 시신은 생피에르 교회당에 묻혔다. * [[마리 당티에르]] 여성의 설교를 인정했던 칼뱅이었으나, 그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설교를 행하던 여성 신학자였던 마리 당티에르와 갈등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